일하다 말고 벼락같이 꽂히는 기억이 있다. 도대체 무엇이 세월 속에 잊고 있던 기억의 끄트머리를 붙잡아 끌어냈는지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때 정말 좋아하던 선생님이 있었다. 내 일기장의 단골 손님이었고 나 말고도 전 학년 전교생에게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분이셨다. 당연했다. 외모도 멋지고 잘생긴 젊은 남선생님이셨다. 게다가 우리 학교는 여고였다ㅎ... 그냥 게임 끝난 거다. 나도 그런 여러 팬들 중 하나였다.
문과 수업을 듣지는 않았기 때문에 1학년 외에는 뵌 기억은 많지 않지만, 임원을 하면서 교무실에 비교적 자주 들락거렸던지라 가끔 대화도 했고 교류도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와중에 어렸던 때라 괜히 관심받고 싶어서 철없는 행동도 조금씩 했었고.. 일부는 약간의 흑역사로 남아 있긴 하지만..
그러나 내가 오래 그 분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내 청소년기를 꿰뚫어 보았던 몇몇의 어른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타인이 전면에 드러내지 않은 이면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건, 과연 어떤 사람이 할 수 있는 걸까?
내 기억에 있는 세 사람 모두 나를 지척에서 보던 사람은 아니었다. 한 분은 심지어 나와 대화조차 한 마디 하지 않았던 분이었다.
그렇지만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내가 숨기고 싶던 면모를 짚어냈던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제3자의 눈이 정확하다는 말이 이런 걸까.
나는 사실 돌이켜 회상할 만한 학창 시절의 기억이 별로 없다.
잘 모르겠지만 그냥 기억이 안 난다. 이렇게 문득 떠오르는 몇몇 기억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억지로 떠올리려고 해도 별 게 없다.
그렇지만 이건 아직도 기억한다. 1학년 2학기의 어느 날, 시험 결과를 배부해주며 약간 찡그린 얼굴로 나를 조용히 부르던 손짓을.
왜 이렇게 성적이 많이 떨어졌냐며 요즘 표정도 안 좋고 무슨 일 있냐고 묻던 그 날.
하필이면 장소가 교탁 앞이었고 비록 겨우 주위 한 두사람만 겨우 들을 법한 조용한 물음이었지만, 모두가 있는 교실에서 그런 질문을 받은 게 나는 좀 창피했던 것 같다.
그 민망함과 더불어 정곡을 찔린 뜨끔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아무 일 없다고 퉁명스레 대답하며 자리로 돌아가버렸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몇 번인가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선생님이 안부를 물어봐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참 고맙다. 담임이 아니었는데도 그렇게 기억하고 지켜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 어떤 점이 좋게 보여서 선생님이 문과도 아닌 학생을 3년 내도록 기억하도록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3학년 때는 선생님이 내 옆 반 담임을 맡으셨다. 복도에서 오다가다 그래도 많이 마주쳤고, 야자 시간에도 종종 감독하러 반에 들르기도 했다.
하루는 밤늦게 야자를 마치고 청소를 하고 있는데 복도 끝에 딸린 빨래터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괜히 말이라도 한 마디 붙이고 싶어서 책 좀 추천해 달라고 했고.. 그 때 추천받은 게 김영하 작가의 오빠가 돌아왔다 였다.
딱 세 마디였지만 그게 어찌나 기뻤던지.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 가는 게 인생의 낙이었던 나는 다음 날 당장 달려가 책을 빌려왔고 한숨에 다 읽어버렸다.
그리고 그 후로 완전한 김영하 팬이 되어 여전히 소설 전 권을 모으고 있다. 여전히 책장에 꽂힌 책들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기억이다.
그 땐 몰랐지만, 그래도 내가 항상 존재하는 곳에 어쨌든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내겐 큰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물론 난 선생님을 정말 좋아했기 때문에 와중에 한 마디 더 해보고 싶어서 몸부림을 치기도 했지만 ㅋㅋ
선생님으로서는 별 생각 없이 그저 안면 있는 학생에게 안부를 물어주셨던 것이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순간이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순간들이 당시 우울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내게 더 깊은 나락으로 빠지지 않을 지지대가 되었고,
이후에는 그곳을 딛고 나올 한 줄기의 따뜻한 기억이 되어 주었다.
십 수년이 지난 지금은 나를 완전히 잊으셨겠지만 나는 아마 가장 어두웠던 시절 내게 보여주었던 관심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 기억조차 못 할 찰나의 순간들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버틸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걸, 나는 잊지 않고 계속 되새기고 있다. 그러니 순간 순간 타인에게 최선을 다하자.
태생적으로 내향적인 내가 많이 부족하기도 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