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로딩중입니다.
NULL: Nothing, No thing

어제의 대화가 오늘까지 꼬리를 물고 내 안에서 이어진다.


돌이켜 볼수록 청소년기의 나는 건강하지 못했다. 맞지 않는 세상을 억지로 끼워입으며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나를 이루던 가치관은 단 하나였다. 나라는 인간에서 그걸 빼면 내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걸 알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다. 주변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으므로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따라서 내 가치는 시시각각 바뀌었으며 단 한번도 충분히 가치있었던 적은 없었다. 최고의 자리는 말 그대로 하나였으니까. 밀려나는 순간 내 가치는 한겨울 서릿발처럼 팍팍 깎여갔다. 그렇게 믿었고 나는 그 믿음을 충실한 학생답게 온 몸으로 흡수했다.  

 

어제 집에 오는 내내 그리고 오늘 아침까지도 생각은 이어졌다. 십 년이 넘게 혼자만 간직한 채 덮어두고 있던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선명함도 퇴색해서, 이제는 그냥 그랬지, 정도로만 넘길 수 있게 된 시절의 기억들이다. 피상적인 느낌 뿐 내 온 몸을 덮쳐오던 격렬한 감정은 더 이상 느끼지 않을 수 있게 된 지 오래다. 사실 평생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타인에게 그걸 내보인 순간부터 물꼬를 튼 것 마냥, 그 위에 덮어둔 오래된 담요를 툭툭 털어낸 마냥 갑자기 기억이 났다. 데자뷰보다는 반추에 가까운 회상이다. 하나하나 짚어가며 현상을 곱씹어보는 것. 내가 평생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그렇게.

되짚어보면 그랬다. 누군가가 필요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참 힘들었기 때문에 나를 거기서 꺼내 줄 누군가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아무도 알아준 이는 없었다. 하긴 누가 알았을까. 나는 비정상 혹은 골치아픈 부류의 아이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겉으로는 멀쩡한 척을 하려고 그렇게도 노력했었다. 동시에 어쨌든 아무도 그 안의 나를 알지 못하는 건, 내가 그만한 진정성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내가 아무리 겉으로 보이는 외면을 치장해도 힘든 내면을 알아차려줄 정도로 나는 병들어 썩어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도 모순적이고 이상한 사고의 굴레다. 누군가는 중2병이라 칭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한동안 나는 이 시기의 나를 중2병이라는 단어로 명명하여 되짚어보기조차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그렇게 덮어두기만 하니 나아지는 게 없었다. 나는 정말 중2 언저리의 미성숙하고 어설픈 청소년이었고, 엉킨 실타래를 되짚어 올라가 흑과 백을 따지기엔 아직 어렸다.

살다 보면 진정성이 필요하단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진정성이란 얼마나 이상적이고 안일한 허상이었나. 내가 그렇지 않은 척 해도 '진정성'이 다하면 누군가는 내 진심을 알아줄 거라는 수동적이고 미련한 그 자세는, 결론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토록 발버둥쳤는데도 진짜 내 상태는 나조차도 제대로 모르는 채 해가 갈수록 눌리고 쌓이며 악화되기만 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 필요했던 건, 누군가 나를 알아차려줄 진정성이란 허상이 아니라 전문가였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듯 그 때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신과란 어딘가 발을 들여서는 안될 금단의 영역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심리적인 문제로 병원을 찾는다? 기실 우리 집에선 안될 얘기였다. 누구보다도 반듯하고 참한 모범생(ㅎ..)인 내가 정신과에 간다는 건 정말 상상조차 못할 일 아니었을지. 당연히 나 또한 그랬다. 그리고 그땐 다 이렇게 사는 줄 알았다. 나만 딱히 어딘가가 힘들거나 한 게 아니라, 다들 그렇게 사는 건데 그걸 굳이 티내는 건 유별나고 엄살을 부리는 일이라 생각했다. 감히 내가 그래선 안될 일이라 생각했다. 

그랬으니 뭔가 나아질 턱이 없었다. 그 때야 몰랐지만 당시의 나는 청소년의 온갖 심리적 문제행동을 다 끌어안고 있었다. 턱없이 낮은 자존감, 왜곡된 자아인식, 자살사고, 공황, 자해, 등등등. 

나는 굉장히 어릴 때부터 죽고 싶어했다. 그리고 사실 죽어도 상관없는 쓸모없는 인간인 나를 포용하고 길러주는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쓸모없는 인간에게 드는 아까운 학원비와 생활비를 아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제가 하기 싫었ㄱ고 자꾸만 공부 말고 다른 것이 하고 싶은, 그 값을 하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선물을 먼저 요구하는 법도 없었다. 대부분의 잡동사니는 학생의 본분에 어긋나는 물건이니 아마도 사달라고 했으면 혼났을 것이고 무엇보다 한두 푼도 아닌 돈이 드는 그런 물건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나를 어떻게 훈육하고 때리든, 어쨌든 감사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매번 대들고 큰소리를 내고야 마는 나를 미워했고 더욱 쓸모없다고 여겼다. 끝없는 루프처럼 그렇게 자아를 깎아가는 대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내 십대는, 정확히 말하자면 어머니의 치맛바람과 자식 학구열이 불타기 시작했던 여섯 살 무렵부터 스무 살까지 그렇게 끝나지 않는 굴레 속을 맴돌며 자기파괴를 일삼았다. 그리고 그 영향은 그 이후로도 계속되고 있다. 

자해를 왜 시작하게 됐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나를 벌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공부가 아니었다면 별로 부모님 뜻을 거스른 적은 없었는데 정말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당시 사소한 말투와 습관, 젓가락질과 친구관계 하나하나까지도 다 간섭을 당했다는 느낌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실제로는 그것보다는 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내가 느끼는 바는 그랬다. 그들은 항상 나보고 게으르고 수동적이고 덜렁거리는 애라고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는 딱히 그렇다기보다 오히려 반대 같다. 지금 와서야 깨달은 내 성향은 아주 독립적이고 내 주관과 영역의식이 강하며, 모든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는 것이다. (MBTI 결과 : 파워 INTJ)

어쨌든 성장기의 나는 자주 부모님에게 반항적이고 냉소적이며 인간미 없고 냉정한 인간이라는 말을 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의 모든 속성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누구나가 가지고 있을지 모를 동전의 양면 중에서 입맛에 맞지 않는 한 면만을 취사선택하여 깎아내고 수정할 점으로 요구했다.

솔직히 이렇게 말하는 지금까지도 나는 그들의 눈에 비쳤던 내 모습이 어땠을지 잘 알 수 없다. 그저 추측할 뿐이다.

중요한 건 모두가 나의 미래를 위한다는 미명 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여기에서 가장 슬픈 아이러니다.

지금의 나는 당시의 그들이 진심으로 나를 위해 그리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정작 그 사랑의 대상이었던 내가 필사적으로 바랬던 건, 내가 그저 이런 모습도, 저런 모습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인간'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째서 나는 지금까지도 그런 너무나도 기본적이고 단순하고 사소한 바램을 이루려 매번 투쟁하는 기분으로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알 수 없다. 아마 나는 평생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가까이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가족이란 내게 남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아마 나는 남들이 가진 당연한 친족에 대한 애정이 조금 결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들이 오해했던 것처럼, 내가 무슨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과 애정이 결핍된 존재는 절대 아니다. 조금 정제된 언어로 말하면 나는 가족에 대한 애착이 깊게 형성되지 않은 모양이다. 
가족 혹은 집이란 내게는 그다지 안전하고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 전까지는 잘 몰랐는데 최근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내가 그토록 누군가 내 방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고, 내가 없는 사이 방에 손대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 된 까닭은 이런 배경을 공유하는 것 같다. 

물론 오랜 시간 동안 부모님은 학업만이 아니라 내게 장녀와 좋은 누나, 애정 넘치는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 또한 많이 바래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제로 아직 어렸을 때는 나도 진심으로 기쁘게 가족 행사에 참여했고, 새해가 되면 바라는 것들을 다함께 적어 간직하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성장할수록 그들이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는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면서도, 평소에도, 가끔 나는 어딘가 망가진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내가 원하는 건 그들과 조금 다르다. 가족은 적당히 멀고, 적당히 가까운 존재였으면 좋겠다. 남들이 생각하는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가족애는 내게 그다지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흔히 우리나라의 눈물을 짜내는 가족 소재 영화들을 내가 극도로 달가워하지 않는 이유가 이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니까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한다' 는 그런 류 영화의 감성적 주제는 별로 와닿지 않는다. 지금도 가족은 내게 문제를 나누고 상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실제로 나는 적당히 친한 친구에게 하는 스몰토크 이상의 대화를 가족과 하지 않는다. 

 

형식적인 이벤트나 행사? 가족이라는 이름과 핏줄? 내게 그런 것 보다 중요한 건 서로를 이해하는가, 서로를 자체로 인정하고 지지해 주는가의 개념이다. 오랜 시간 이 중추가 충족되지 못한 나로서는 가족이란 조금 더 가까운 타인일 뿐이다.


이전에 부모님은 이것을 굉장히 서운해 해 종종 내게 화를 내기도 했는데, 억지로 무언가를 털어놓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실제로 몇 번의 시도와 실패는 내게 허무함만을 남기고 떠났다. 우리는 확실히, 너무다도 다른 인간이다. 언젠가 어렸을 때는 그랬을 지 모르나, 그것을 깊게 깨달아버린 이상 나는 더 이상 가족을 남이 아닌 나의 일부처럼 느낄 수 없다. 

부정할 수 없는 인과관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복잡한 것은 덮어두었으면 좋겠다. 아마도 지금의 내가 원하는 것은 정말로 그들이 말하는 가족이라면 지금의 나 또한 이해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지난 2년여 간의 노력인지 아니면 그들의 포기 탓인지 지금은 삼분의 일 쯤의 성공을 거두었는데 앞으로 또 얼마나 지난한 과정이 있을지는 모른다. 그래도 나는 지금이 훨씬 편안하다. 왜냐면 내가 어릴때부터 바랬던 것은 단 하나였기 때문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 내가 좋아하고, 내가 편안해 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해 주길 바랬던 것 뿐이다. 

계기는 너무나 사소했으나 너무 긴 시간을 멀리 돌아와 버렸다.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모든 과정들을 거쳐 나는 지금처럼 어딘가 뒤틀린 채로 컸는데, 어쨌든 나는 그 동안 끊임없이 이런 나를 바꾸고 과거의 기억을 다독이려 노력했으므로 지금 정도로 유지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몇 번인가 찾아왔던 공황에서 나는 오롯이 혼자였다. 그 때 뿐만이 아니라 인생에서도 언제나 혼자였다. 누군가 있다고 느껴본 적은 거의 한 번도 없다. 전적인 이해와 지지를 내밀어 주었던 곳 또한 없었다. 부모조차 나를 있는 그대로 지지하는 대신 나를 끼워 맞추고 교정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친구관계에서도 이렇게 속으로 흔들리고 곪아있는 나를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발도 넓지 않고 은근히 폐쇄적이고 까다로운 인간이 되었다. 적당히 가깝고 적당히 먼 관계를 항상 지향해왔던 나는, 바꾸어 말하면 남들이 내게 그 만큼의 거리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대부분의 관계에서 적당한 거리감은 항상 어려웠다. 사람들은 너무 멀어졌다 생각하면 서운해했고 지나치게 가까워지면 내가 힘들어졌다. 그걸 조금 후회하기도 했으나 그건 어쩔 수 없는 내 본성이었고 또 특히나 학창시절의 내겐 그만큼의 심리적 여유가 없었다.

내가 느끼는 삶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의 몸 숨길 곳 하나 없는 사막이다. 생각하면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에 살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선연하다. 참으로 재미있게도 어디 하나 모난 곳 없는 가정에서 자란 내가 느끼는 삶이란 이토록 고독했다. 아무데도 애착을 느껴보지 못한 인간이 느끼는 삶은 이렇게 되는 모양이다.

끝없는 자살사고와 자해는 어떻게든 정신적인 상흔을 남겼다. 본능적으로도 이걸 누군가 알게 되면 좋지 않을 것을 알고 있어서 겉으로는 최대한 성실한 모범생인 척 살려고 했으나 고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가 이걸 알아버렸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의존성이 높아졌고 나는 친구 대신 전문가에게 마음의 안정을 찾았어야 했다. 친구관계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 후로 그 어떤 부정적인 것도 밖으로 내보이지 않으려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러다보니 우울은 내게 배척할 것이었고 잘못된 것이었다. 좀 더 일찍 도움을 청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가끔 팔의 칼자국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 굉장히 섬짓하다. 자해를 굉장히 많이 했지만 시선을 신경 써 매번 약을 바르고 소독하고 흉터가 남지 않게 관리했다. 자연적인 상처와 달리 칼자국은 어떻게든 부자연스럽게 직선인  형태를 남기며 아문다. 시간이 오래 지났지만 여전히 팔에는 자세히 보면 무수한 하얀 흉터가 남아있다. 부정하고 싶지만 과거는 어쨌든 현재의 나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원망이나 한탄이 아니다. 물론 의식의 흐름대로 떠오르는 대로 써갈긴 게 맞긴 하지만, 나는 어쨌든 나를 돌아보고 글로써 정리하길 원했다. 사실 나는 이십대가 되어서도 정말 오랜 시간을 나를 돌아보고 다독이는 데 써야만 했다. 이건 내가 늘 해왔던 과정이다. 끊임없이 되새기고 되새기면서 그 때의 나와, 내 상황과, 내 주변을 이해하고 용서하고저 하는 과정이다. 물론 지금은 거의 다 했는데, 아무튼 그래도 상흔은 여전히 내 깊은 어딘가에 남아 여전히 조금만 건드려도 잔뜩 웅크리는 것처럼 뭉근한 통증을 일으킨다. 아마도 평생 그럴 것이겠지. 평생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를 안고 사는 것처럼 다독이고 덧나지 않도록 다듬어 줘야 할 것이겠지. 그러기 위해서 쓴다.  

'USB'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타인의 방 -1  (0) 2021.10.19
단 하나의.  (0) 2021.10.13
배고픔의 착각  (0) 2019.05.13
액자 속의 인간  (0) 2019.03.22
사랑이라는 이유로  (0) 2019.02.07
2019. 7. 11. 15:14  ·  USB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