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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방은 자신의 내면 상태와도 관련이 깊다고 한다.
항상 반신반의 했는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맞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도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면 방을 정리할 여유가 없어지는 것도 맞지만,
내 경우에도 한창 가시를 세울 때는 정말 누구도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나는 원래도 내 방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데 굉장히 낯설고 인색한 편이고,
비슷한 맥락에서 일터나 사적인 다른 장소에서도 내 공간, 퍼스널 스페이스를 불쑥 침범하는 행위를 매우 무례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일하는데 아무런 말도 없이 불쑥 다가와 내 스크린을 뒤적이며 이러쿵 저러쿵 한다던지.. 아무리 사람이 괜찮아도 그런 행동을 하면 나는 본능적인 불쾌감을 느껴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다..)
한 마디로 내가 허용하는 타인에 대한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매우 좁은 것이다.

이건 성장 과정에서도 영향을 받긴 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태생적 성향 같다.
실제로 어린 시절에 남은 기억 중에도 그리 친하지 않은 반 친구와의 스킨쉽이 매우 부담스럽고 불쾌했던 기억이 남아있는데, 어렸을 때라 나도 모르게 그 친구의 손을 뿌리쳐 안 그래도 거리감 있던 사이가 더 멀어졌던 기억이 있다 (...)
뭐 이외에도 비슷한 기억들이 꽤 있다. 자라면서 좀더 이런 성향이 두터워졌을 수는 있겠지만.

아무튼 나 같은 케이스는 폭풍 같던 사춘기 이후 사실 부모님과는 크게 다툴 일이 없어야 했다.

갈등을 일으키는 주요 매개체이자 핵심이던 입시와 공부가, 사실상 대학에 들어가면 부모와의 관계에서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경우 갈등이 약화될지언정 사라지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부모님이 끈질기게도 내 성적과 공부에 지속적으로 개입을 하고자 했으며 실상 공부가 아니라도 성장기 시절 너무 벌어진 심리적 거리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 메인 갈등으로 급부상한 것은 바로 나의 방에 관한 문제였다.

이 때의 나는 반쪽짜리 자유를 누렸다.
새 친구들, 새 무리에 끼어 이제껏 보지 못한 세상을 만나고 즐거워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하루하루를 만났다.
하지만 덜 자란 반대편 날개에는 여전히 떨쳐내지 못한 이전의 과업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발목을 붙들고 있었다.

 

내가 안고 있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하루하루 무감한 회색 나날을 보내며 시달렸던 성장기와는 달리 고통 속에서 몇 년간 끊임없이 나를 되돌아보고 되짚으며 곱씹어 본 후, 성인이 된 나는 내 안에 있는 게 분노란 걸 분명하게 알았다.

이 분노란 건 매일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는데 다 지나간 과거를 비겁하게 꺼내 지난한 전쟁을 반복할 엄두와 기력이 없었던 나는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며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감정을 죽이기에만 급급했다.

 

학창 시절 틈만 나면 도서관에 달려가서 마치 수행하듯 온 책을 읽어대던 난 대학생이 되어서도 과외활동이나 동아리 활동에 전념하고 때로는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며 괜찮은 일상 아래 평온을 유지하며 살았다.

그 괜찮은 모습은 사실 필사적인 고뇌의 결과였다. 스스로를 어르고 달래고 지금처럼 글을 쓰고 생각하며 정말 많은 시간을 쏟아부으며 이루어낸 모습이었다.

겉으로 엉성하게나마 기워진 괜찮음일지라도 좋았다. 이전보다는 행복하고 자유로웠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지만 내 안에서는 어떻게든 뚝딱뚝딱 스스로를 유지보수하고 있었을지언정 타인과의 관계는 불가능했다.

왜냐면 그 대상과 관계를 맺어야 나아질텐데, 현재진행형으로 끓고 있는 화를 안은 채로는 아무 진전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부모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분노를 품은 채로 그저 그것들이, 내가 품고 있는 어두움이 새어나가 내 주변과 나를 물들이지 않기많을 바랐다.

형식적으로나마 괜찮아지고 있는 모든 평화로운 것들을 망쳐버리지 않기만을 원했다.

그냥 그게 그 때의 나였다.

 

부모님은 이런 나를 문자 그대로 전혀 몰랐고 아마 짐작컨대 지금도 그럴 것이다.

대학 입학 무렵 받았던 엄마의 편지를 읽고 나는 웃으며 엄마를 이해하고 용서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어쩌면, 아마도 그걸로 어느정도 됐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진정 그를 이해하고 연민하면서도 단 한 번 그 편지를 읽고 버려버렸다.

단 한통의 편지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 있고, 그 안에 담긴 마음을 알면서도 쓰레기통에 넣을 수 밖에 없는 마음이 있다.

 

사람이 행동을 결정하는 데는 도대체 몇 가지의 감정이 필요할까?

그 순간의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마음이 담긴 편지를 버리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을 세었다.

영점 아래 자리가 수없이 많은 무수한 감정들이 싸우는 속에서 나는 그렇게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기원은 사랑이기 때문에, 나는 이 투쟁을 알려 그들을 상처주고자 한 적은 없다. 

서로가 진심이었고, 진심이었기 때문에 슬픈 아이러니다.

아마 지금이라면 그 편지를 서랍에 넣어 먼지없이 보관했을 수 있을 테지만.

 

삼천포로 좀 빠졌지만 이런 와중이었기 때문에 나는 나를 드러낼 수 없었다. 입만 열면 내가 꾹꾹 눌러담고 있던 것들이 왈칵 터질 것만 같아서였다. 

그러나 부모님으로서는 드디어 길고 긴 입시생활이 끝나 자식과의 관계에서 갈등할 것도 딱히 사라지고 꽃길같은 미래만이 남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십여 년간 벌어진 거리는 예상치 못한 곳곳에서 지뢰를 터뜨렸다. 

그 첫 타자이자 최근까지도 이어진 오랜 1번타자는 방이었다. 

 

이유는 별 것 없었다. 내가 없는 사이 방이 항상 변해 있었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정리를 한 것일 터다. 바쁘게 나가는 아침에는 잠옷도 던져놓고 갈 때가 있었으니 그런 옷가지들도 거둬들이고, 뭐 이런저런. 말하자면 좋은 의도였겠지만 나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내가 없는 사이 내 공간에 일어나는 변화 그 자체가 극도로 싫었다. 얼마나 싫었냐면 진저리가 처질 정도로, 좋은 의도니 좋게 받아들여, 가 이성적으로 전혀 되지 않을 정도의 근본적인 불쾌감이었다. 

내 퍼스널 스페이스가 아주 좁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지금도 종종 있는 일이지만, 내 공간을 함부로 침범당한 듯한 불쾌함은 두 경우가 아주 흡사하다.

 

부모님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물건을 가져가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것을 훔쳐보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며 오히려 나를 나무랐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별 것 없어 보이는 갈등은 대부분 출구 없이 오랜 시간을 헤매게 된다. 이놈의 방이라는 테마도 최근까지도 나를 괴롭히는 갈등의 주제였는데, 내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매개체가 너무 별 것 없어 보이기 때문에 그 싫음이 무시당하는 안타까운 현상으로 참 길고도 길게 이어져왔다.

 

나는 태생적으로 주관이 뚜렷하고 내 영역의식이 강한 사람이지만, 사실 내 성향만이 전부는 아니다. 

"물건을 가져가는 것도 아니고 네 일기장 같은 걸 보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니?"

처음 이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마음 속으로 생생히 코웃음쳤다.

'일기장을 안 본다고? 왜 새삼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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