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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일기를 왜 쓸까?
쓰라고 하니까, 혹은 오늘 하루를 돌아보기 위해서.
나는 주로 내 감정을 돌보기 위해 썼다.
내 안에 담아만 두기에는 버거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말하고 싶지 않은 그런 새어나오는 감정들을 풀어내기 위해서.

중학생 때의 일이다.
당시 좋아하던 남자애가 있었다. 별로 되돌아보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기억은 아니지만..
나는 이 방면에 있어서는 상당히 내 마음에 솔직하고 당돌한(...) 애였기 때문에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나름 너도 알고 나도 알고,
그치만 딱히 받아들여지진 못한 슬픈 관계였다. (한마디로 말만 안했지 차인 거나 다름없는...)
아무튼 아름답진 않은데 그래도 그 때의 호감은 진심이었다.

마음에 가만히 담아만 두기에는 너무 천연색의 감정이어서 견딜 수 없을 때 일기를 썼다.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만의 마음이라 나름대로 꽁꽁 숨겨두었다.
특히 어릴 때부터 있어왔던 어머니의 방청소에 걸리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했다. 그 공포의 방청소에 걸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뭔가가 사라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대개 없어지는 1순위는 내가 그린 그림들이었다. 언제부턴지도 모르게 그림을 너무 사랑해버린 나는 멍하니 있으면 으레 손이 낙서를 할 정도로 숨쉬듯이 그림을 그렸다. 가끔 숙제를 하다가도 몰래 노트에 그림을 그렸고 내가 상상한 이야기를 만화로 이어나가기도 했는데, 공부 외의 모든 것을 방해체로 여겼던 어머니는 진공청소기처럼 모든 것을 빨아내 압수하셨다.
그림이나 만화가 걸리면 초반에는 종종 공개처형 전시회를 당했고.. (거실에서 이거 보라며 던져놓고 가족들이 보게 했다)
이후에는 그냥 말도 없이 사라졌다. 있었는데 없었으면, 대충 아 걸렸구나 하고 단념하면 됐다.
처음에는 내가 어디 뒀나 찾았는데 어느 날 쓰레기통에서 찢긴 그림의 조각을 발견하고 그 때 이후로는 한 번도 찾아본 적이 없다.
뭐 이 사건들은 언젠가 다시 글로 회상해볼 것 같긴 하다.

2순위는 일기장으로 이건 없어지진 않았고 얼핏 보면 누가 들여다봤다는 것도 모르겠지만
난 엄마가 내 일기장의 열혈 구독자라는 걸 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일기장을 두 개를 두었다. 하나는 공개용 일기장, 다른 하나는 정말 진심이 담긴 진짜 일기장.
당연하지만 진짜 일기장에는 순도높은 감정들이 있었다. 도무지 내 안에 담아만 놓을 수 없던 총 천연색들의, 내 깊은 곳의 진짜 마음이.

아무런 허물도 덮지 않은 내 마음이 있었기에 누군가 할퀴거나 그것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조롱하면 정말로 크게 다칠 것 같아 나는 아무도 모르게 그 위로 짚단도 올리고 흙도 덮고 최대한 보호색으로 위장을 했다.
나름대로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방청소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 꽁꽁 숨기고 숨겨도 들켰다.

내가 좋아했던 모든 것, 싫어했던 모든 것은 그렇게 낱낱이 엄마의 입에 올려졌다.
그는 언제나 연예인의 가쉽지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앞에서 내가 가장 숨기고 싶었던 것들을 말했고 그건 별로더라 이건 저거더라, 그렇게 감상평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중학생 때 내가 좋아했던 남자애에 대한 얘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학원 선생님에게까지 넘어가 급기야 학원 수업시간에 딴짓을 하던 내 귀로 다시 돌아왔다. 당시 수업을 같이 듣던 여러 아이들 앞에서.

나는 아직도 호호 웃으며 내 앞에서 선생님에게 그 얘길 하던 그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들에게는 그게 아주 유쾌한 농담이었을까.

 

자식이 없는 사이 방을 뒤져 적어놓은 속마음을 보고 관심사를 알고 요즘의 진짜 생각을 안다.

그건 자식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었을까? 어떻게든 대화를 하고자 하는 노력이었을까?

너무 순수해서 잔인해져버린 그런 부류의 호기심이었을까?
혹은 누군가가 완벽하게 숨겼다고 자신한 것을 모두 알고 있다는 절대자의 비밀스런 우월감이었을까?

 

그들은 내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당당했을까?

나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그럴 때마다 웃으며 때로는 무안해하며 얼버무렸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그 때 느낀 감정들의 정체를 알았다. 그건 지독한 수치심과 분노였다.

 

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누군가가 숨겨놓은 보물쪽지를 파헤치는 재미에 눈이 멀어 그것을 그 사람의 진정한 면모를 알아가는 과정이라 착각한다면, 마지막으로 찾아낼 건 관계의 종말일 뿐이다.

 

나는 그 후로 어디에나 도사린 타인의 시선을 의식했다.

정말 숨기고 싶고 소중한 것은 어디에도 남겨두지 않았다. 본디 너무 소중한 건 꺼내놓지도 말아야 하는 법이었다.

눈으로 보아도 닳을 법한 소중한 것은, 스스로가 아끼고 지켜야 한다.

 

청소년기의 내겐 사생활이 희박했고 내 방도 시간도 인간관계도 짜여진 시간표와 의도된 그물망 안에서, 마땅히 있어야 할 시간과 장소에 없으면 경로를 추궁받는 일상 내 속속들이, 구석구석 타인이 존재했다.

슬픈 점은 이게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내 주위에서는.. 

이 곳은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치맛바람이 휘날리는 곳이었으니.

 

그러니 나의 방 또한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나 다름없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곳이란 다시 말해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은 곳이다. 타인의 방이다.

내가 생활하는 몇 평의 땅에 벽이란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곳은 이름 모를 누구든지 지나가는 아스팔트 길바닥처럼 함부로 짓밟을 수 있는 불안한 벌판이었을 뿐이다.

 

나는 성장하면서 진정으로 내가 머물고 쉴 수 있는 곳을 갖기를 소망했으며 보호받을 벽을 원했던 것이다.

그 당연한 소망을 내 자아가 견고해지며 외쳤을 뿐이다.

"나가! 허락 없이 들어오지 마. 날 함부로 침범하지 마!"

 

누구나 이 세상에 자신이 서 있을 한 줌의 공간을 필요로 한다.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단단하고 안전한 공간.  

나는 감정을 통제하는 데 아주 익숙해져 있지만 나의 공간이라고 인식한 곳들을 침범당했다는 감각이 오면 스스로 주체하기 어려운 원초적인 감정들이 요동친다.

아마도 최소한으로 보장받고 싶었던 나의 영역- 물리적 또는 심리적인 공간들이 맞물려 그런 침입을 나도 모르게 내 자아에 들이미는 위협 또는 도전이라고 인식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참으로 신기하게도 사람은 조금씩 변하기도 하나 보다.

여전히 내 영역에 대한 경계의식은 강하지만, 나는 2년 동안 많이 변화했다.

무작정 숨기고 덮어두려고만 했던 내 안의 찌꺼기들,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얘기들을 선생님에게 털어놓고

때로는 이렇게 글로 적으며 한 글자 한 글자 나를 덜어냈다.

 

여전히 가끔은 이렇게 과거의 기억을 뒤집어쓰기도 하지만 나는 이제 내 뒤에 놓인 터널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아주 길고 어둡고, 또 축축했다. 가끔은 지나고서야 알 수 있는 길도 있는 것이다.

 

이제는 죄책감도, 분노도, 애정도 모두 제 갈길을 가고 애쓰지 않아도 그들을 내 가족이라 포용하게 된 지금.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처럼 문득 지나보니 어? 하고, 내가 더 이상 예전처럼 내 방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놀랍게도.

 

이제는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그들도 반복학습처럼 나의 반응을 학습해 부쩍 그런 침입이 줄어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저만치 멀어진 곳에 세우고 있던 가시도, 그 간극도 어느 새 메워지고 무뎌진 것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엄마를, 부모님을 미워하지 않는다.

 

이전에도 이해는 했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던 지난날을 떠나보냈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오는 것이다. 언젠가 상상했던 그런 날들이.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너무 지난한 눈물과 고통과 노력(과 금전)이 있었기에 나는 이런 슬픔을 절대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 당연하지만 추천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간단하고 상큼하게 극복할 만한 세월이 아니었기에.

 

그래도 사람은 노력하면 변할 수 있으며 이 끝나지 않는 고통도 언젠가는 종말을 맞을 수 있음을.

나는 타인의 방이었던 나의 방에서 평화를 기원하며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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