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플레이리스트에서 흘러나오는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주신 옛 전설을 듣고
오늘도 마음 속이 몽글몽글 해졌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이렇게 아련한 추억을 떠올릴 때와 같은 기분이 든다.
게임에서의 즐거웠던 기억이 아니라 마치 실제 현실에서 겪었던 과거의 추억을 떠올릴 때와도 비슷한.
아무래도 마비노기는 내게 단순한 게임이 아닌 추억이 담긴 공간으로써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왜 이렇게 이 게임을 좋아하는가? 하고 가끔 곰곰이 생각을 해 보지만 언제나 도달하는 같은 결론이다.
여중생A 라는 웹툰이 있다.
몇년 전 드라마화도 되었던 웹툰인데, 드라마는 어쩐지 내 환상을 깰 것 같아 망설여져 안 봤지만..
원작만큼은 단순히 좋아한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 만큼 큰 애정을 가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 웹툰에도 주인공 미래가 하는 게임이 마비노기로 나오는데 ㅎㅎ
꼭 그래서는 아니고, 연재 때부터 이건 내 얘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깊게 공감하며 보았던 웹툰이기 때문이다.
비록 나와 미래가 처한 상황이 완전히 같지는 않았지만 만화에 담겨있던,
미래가 느끼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은 정확히 내가 학창시절 느꼈던 것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당시 현실에서 즐거움을 찾기 힘들었던 십 대의 나는 상당히 게임에 몰두했었고
세밀한 생활감과 커뮤니티를 잘 살린 마비노기의 게임성과 맞물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꽤나 깊은 유대를 쌓았었다.
랜선 너머 온라인에서, 비록 실체가 없는 관계일지 모르나 적어도 나에게는 아주 소중하고 밀도있는 유대감을.
사실 현실과 다름없이 즐겁기만 하지는 않고 울고 웃고 싸우고 마음 상하기도 했다.
참 묘한 경험이었다.
닉네임 뒤에서, 사실 지나가려면 얼마든지 지나갈 수 있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계속 랜선 인연을 유지하고 울고 웃고 싸우기도 하는 것이.
일부는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인연이었지만, 남은 이들과는 그렇게 시간을 쌓아가다 보니 어느 날 정말 친구처럼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나이도 성별도 사는 곳도 모두 달랐지만 다함께 지내는 게 참 즐거웠다.
새벽에도 게임 속 모닥불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심지어는 새해에도, 명절에도 현실 대신 게임 속 집에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축하를 나누었다.
그 때는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어 막연히 나에게만 소중한 추억일수도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십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문득 떠올라 안부를 물으면 바로 반갑게 응답하는 그들에게서
그들 또한 나와 크게 다르지 않게 당시를 추억하고 있음을, 좋은 기억으로 나와 그 때를 기억하고 있음을,
그렇게 한 켠에 묻어둔 마음이 통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선지 나는 학창시절, 특히 게임에 마음을 많이 쏟았던 중학교 후반~고등학교 시절을 추억하면
현실보다 게임에서 만났던 나의 랜선 친구들과 게임 속에서의 추억이 먼저 떠오른다.
현실도피, 냉정하게 말하면 네 글자로 간단히 함축될 수 있는 감정들일지 모르나
내게는 쓸쓸하고 힘들기만 했던 청소년기를 버티게 해준 고마운 시간이자 추억이었다.
나는 그 시간이 없었다면 더욱 힘든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마비노기가 타락(?) 해도,
나는 이렇게 브금만 들어도 아련한 감상에 젖어버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게임으로 꼽게 되는 것이다.
내게 마비노기란 게임은 단순히 게임을 넘어 내가 몸담았던 세계이고 소중히 여기는 추억과 사람들을 품고 있었던,
한 마디로 내가 살았던 또 하나의 현실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나는 한 명의 미래였고,
청소년기를 깨고 나와 열심히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또 한 명의 미래로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일하다 말고 벼락같이 꽂히는 기억이 있다. 도대체 무엇이 세월 속에 잊고 있던 기억의 끄트머리를 붙잡아 끌어냈는지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때 정말 좋아하던 선생님이 있었다. 내 일기장의 단골 손님이었고 나 말고도 전 학년 전교생에게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분이셨다. 당연했다. 외모도 멋지고 잘생긴 젊은 남선생님이셨다. 게다가 우리 학교는 여고였다ㅎ... 그냥 게임 끝난 거다. 나도 그런 여러 팬들 중 하나였다.
문과 수업을 듣지는 않았기 때문에 1학년 외에는 뵌 기억은 많지 않지만, 임원을 하면서 교무실에 비교적 자주 들락거렸던지라 가끔 대화도 했고 교류도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와중에 어렸던 때라 괜히 관심받고 싶어서 철없는 행동도 조금씩 했었고.. 일부는 약간의 흑역사로 남아 있긴 하지만..
그러나 내가 오래 그 분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내 청소년기를 꿰뚫어 보았던 몇몇의 어른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타인이 전면에 드러내지 않은 이면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건, 과연 어떤 사람이 할 수 있는 걸까?
내 기억에 있는 세 사람 모두 나를 지척에서 보던 사람은 아니었다. 한 분은 심지어 나와 대화조차 한 마디 하지 않았던 분이었다.
그렇지만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내가 숨기고 싶던 면모를 짚어냈던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제3자의 눈이 정확하다는 말이 이런 걸까.
나는 사실 돌이켜 회상할 만한 학창 시절의 기억이 별로 없다.
잘 모르겠지만 그냥 기억이 안 난다. 이렇게 문득 떠오르는 몇몇 기억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억지로 떠올리려고 해도 별 게 없다.
그렇지만 이건 아직도 기억한다. 1학년 2학기의 어느 날, 시험 결과를 배부해주며 약간 찡그린 얼굴로 나를 조용히 부르던 손짓을.
왜 이렇게 성적이 많이 떨어졌냐며 요즘 표정도 안 좋고 무슨 일 있냐고 묻던 그 날.
하필이면 장소가 교탁 앞이었고 비록 겨우 주위 한 두사람만 겨우 들을 법한 조용한 물음이었지만, 모두가 있는 교실에서 그런 질문을 받은 게 나는 좀 창피했던 것 같다.
그 민망함과 더불어 정곡을 찔린 뜨끔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아무 일 없다고 퉁명스레 대답하며 자리로 돌아가버렸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몇 번인가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선생님이 안부를 물어봐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참 고맙다. 담임이 아니었는데도 그렇게 기억하고 지켜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 어떤 점이 좋게 보여서 선생님이 문과도 아닌 학생을 3년 내도록 기억하도록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3학년 때는 선생님이 내 옆 반 담임을 맡으셨다. 복도에서 오다가다 그래도 많이 마주쳤고, 야자 시간에도 종종 감독하러 반에 들르기도 했다.
하루는 밤늦게 야자를 마치고 청소를 하고 있는데 복도 끝에 딸린 빨래터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괜히 말이라도 한 마디 붙이고 싶어서 책 좀 추천해 달라고 했고.. 그 때 추천받은 게 김영하 작가의 오빠가 돌아왔다 였다.
딱 세 마디였지만 그게 어찌나 기뻤던지.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 가는 게 인생의 낙이었던 나는 다음 날 당장 달려가 책을 빌려왔고 한숨에 다 읽어버렸다.
그리고 그 후로 완전한 김영하 팬이 되어 여전히 소설 전 권을 모으고 있다. 여전히 책장에 꽂힌 책들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기억이다.
그 땐 몰랐지만, 그래도 내가 항상 존재하는 곳에 어쨌든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내겐 큰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물론 난 선생님을 정말 좋아했기 때문에 와중에 한 마디 더 해보고 싶어서 몸부림을 치기도 했지만 ㅋㅋ
선생님으로서는 별 생각 없이 그저 안면 있는 학생에게 안부를 물어주셨던 것이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순간이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순간들이 당시 우울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내게 더 깊은 나락으로 빠지지 않을 지지대가 되었고,
이후에는 그곳을 딛고 나올 한 줄기의 따뜻한 기억이 되어 주었다.
십 수년이 지난 지금은 나를 완전히 잊으셨겠지만 나는 아마 가장 어두웠던 시절 내게 보여주었던 관심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 기억조차 못 할 찰나의 순간들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버틸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걸, 나는 잊지 않고 계속 되새기고 있다. 그러니 순간 순간 타인에게 최선을 다하자.
태생적으로 내향적인 내가 많이 부족하기도 한 부분이다...
본질이란 무엇일까?
나에게는 어릴 때부터 이 물음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어떤 현상이 있다면 그 피상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이런 현상을 일으키는 동력이 되는 것일까?
당연히 어릴 때의 나는 호기심천국이었다.
자연스럽게 책을 열심히 읽게 되었다. 책은 언제나 흐름을 갖추어 서술되므로 다양한 궁금증을 해소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때로는 글자의 나열만으로도 어딘가의 심금을 건드려 아름다움을 알려주기도 했다.
나는 행동보다 생각이 앞서는 유형이라 지금도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기 전에는 좀처럼 말하지 않으려 한다.
어쩌면 책으로 배운 세상은 실제와는 사뭇 달랐기에 어렸던 나는 말수가 더 적었던 것 같다.
언제나 틀리지 않아야 하는 것도 아닌데, 틀리기가 무서웠다.
현실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알 수 없던 것도 많았고,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다채롭고 강렬하고 다양한 것들이 있었다.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내가 보던 것 또한 고작 어린애의 세상일 뿐이었다.
이런 유형의 애들이 흔히 그렇듯 나는 외부에 대한 감수성이 아주 예민한 반면 실제 생활에서는 부딪히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인간관계가 그랬다. 어떤 행동을 하면 예상대로의 반응이 돌아올 때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을 때도 많았다.
발화와 행동의 의도는 전하고 전해지며 왜곡되기 마련이었고, 그럴 때마다 당혹감 혹은 아득함을 느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침묵이 낫다고 생각했다. 대충 미소짓거나 웃는 것이 무엇이 돌아올 지 모를 말보다는 나았다.
그때는 그렇게 더더욱 입을 다물었지만 언젠가부터 깨닫게 되었다.
모든 일을 어떠한 법칙에 따라 나열할 수는 없는 거구나.
어떤 건 인과관계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혹은 너무나 복잡할 수도 있다. 혹은, 있는데 우리가 모르는 걸 수도 있다.
그냥 그런 거구나.
누구나 성장하는 계기가 있듯이 나는 그걸 깨닫는 데 상당히 오래 걸렸다.
그리고 그런 걸 깨달았다고 갑자기 전구에 불이 켜지듯 반짝이는 해결책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그런 인간이고, 세상에는 이런 인간도 있는 거였다.
그리고 그땐 몰랐지만 남들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누구나 그런 경험은 비일비재하다.
나는 생각보다 이상하지 않으며 다만 생각이 너무 많을 뿐인 보편적 인간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데 참 오래 걸렸다.
하지만 성향은 어쩔 수 없어서 나는 지금도 참으로 호기심이 넘치는 인간이다.
살면서 스스로를 탐구하고 이해하는 데 엄청난 시간을 썼기 때문에 나는 기본적으로 나에 대해 관심이 많지만,
동시에 남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굉장히 궁금해 한다. 나와 타인의 의견이 모두 합치하는 것이 어떤 것에 대한 보편적 진실이자 본질이라면,
나는 맨 처음 말했던 것처럼 그 본질을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모든 지식을 알아가는 과정은 사람을 알아갈 때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해도 왜 그랬을지를 따져보며 심층을 되짚어 따라간다면
그 사람과 그 행동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무작정 입을 다물고 살던 때 몸소 체감하며 깨달은 게 있다면, 어쨌든 몰이해는 해롭다는 점이다.
지식이 필요할 때면 책을 읽듯 사람과 의견을 나눌 때는 대화를 한다.
하지만 살다보면 생각 외로 대화를 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내 생각엔, 너도 나도 여기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을 잘 인지한 채 서로의 의견을 알아가는 게 진정한 대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간단해 보이는 상황은 의외로 참으로 갖추기가 힘들다.
우리는 모두 감정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릴 땐 그러면 나도 금방 흥분해 되받아치기 일쑤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상대방은 아주 비논리적이었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지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머리가 좀 더 크고 나서는 어찌 되었든 꾸준히 대화를 시도하려 한다.
그래야 왜 그런지 서로를 이해하고 합치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치는 작업이다. 아주 지겨운 작업이다.
어찌됐든 쌍방의 인내심에 한계는 존재하기 때문에 임계점은 언젠가 다가오기 마련이다.
이렇게 노력해서 비교적 평화롭게 상황을 종료시키는 것이 한 30%라고 한다면, 나머지 70%는 거의 그냥 싸움으로 끝나고 만다.
나는 친밀한 사이의 다툼을 해롭다고 여기지 않는다. 비록 나도 살면서 완전한 타인인 누군가와는 딱히 싸워본 적도 없지만,
다툼이란 의견차이가 있어 발생하는 거고 적어도 그걸 좁히고자 노력을 하는 행위이다.
감정이 상할지언정 차라리 무시하는 것보다 어쨌든 노력을 한다는 데 나는 훨씬 큰 점수를 준다.
무시하는 순간 쌓이는 몰이해는 자칫하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골을 만들어버리기도 하니까.
역시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
가끔 내가 너무 큰 바람을 가진 걸까 생각한다.
남들은 아무래도 좋을 것을 쓸데없이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나는 누군가 나를 위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왜냐하면 나는 오랜 시간을 이해로부터 도피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인간은 서로를 100% 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상적인 숫자는 있을 수 없다. 완전히 동일한 사람은 없으며, 우리는 남이 되어볼 기회 또한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걸 알고서도 노력해줄 수 있다면.. 그건 참 멋진 일일 것이라 생각한다.
대부분 결국은 싸우고 잔뜩 화가 난 채로 끝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꾸준히 대화를 해보고자 노력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하는 건 적어도 나와 상대방은 같이 걸어갈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계는 단발적으로 잘리고 엉킨 이해가 쌓여 있을 뿐인 어떤 무더기가 아니라,
최대한 곱게 보듬고 정돈하여 오래 두고 볼 만한 그런 것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몇십 년을 두고 볼 사이라면, 나는 그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노력을 같이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면 좋겠다.
내 나이와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아주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소망일 지는 몰라도,
나는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주려 노력하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아주 옛날부터 간직해 왔던 것 같다.
그녀에게 나의 글쓰기가 어떤 의미가 될 것인가 생각하면 언제나 낭떠러지 아래를 바라보는 것처럼 막막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나는 벌써 서른한 살이고, 성인이 된 지도 십 년이 넘었고, 그녀가 내 삶을 지연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누구보다도 성실히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 정도로 성장했다. 그녀는 그저 그녀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 나를 옥죌 의도가 없고, 나 역시 그저 나로 존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똑같은 인간에 불과하다. 다만 운이 나빳을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며 암이나 곰팡이처럼, 지구의 자전이나 태양의 흑점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우주의 현상이다. 이런 것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자꾸만 그녀가 내 모든 문제들의 원인인 것만 같았다.
ㅡ 박상영, 우럭 한 점 우주의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