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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5.13 배고픔의 착각
  2. 2019.03.22 액자 속의 인간
  3. 2019.02.07 사랑이라는 이유로
  4. 2019.02.01 Salty lake
  5. 2019.02.01 미움과 채움의 상관관계

결핍이 성취의 충분조건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사실 꽤나 오랫동안 그런 생각을 했다. 어릴 때부터 정말 많은 이들이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배부르게 하면 아무것도 못해. 소위 헝그리 정신 말이다. 무언가 단단히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어 그걸 채우기 위해 죽어라 아등바등 노력하는 것, 그리고 그런 방식만이 결국 성공에 다다르는 길이라는 것. 지금 생각하면 병든 착각 같다. 

어째서 한계까지 내몰려야만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걸까. 그렇게 절박하게 얻은 성취가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러기 위해 나를 핍박하는 지난한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은 허상이라는 의미다. 무엇이든 성장에는 자양분이 필요한 것처럼, 충분한 휴식과 자원이 있는 상황에서 더 안정적인 성취가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현재에 만족한다는 말은 결코 무언가를 대강 해낸 채로 안주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왜냐면 누구나의 인생은 한 개의 목표를 향해 뛰어가는 전력질주가 아니라, 여러 개의 역으로 이루어진 기찻길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찾아가려 살면서, 왜 그 길은 고난으로 가득 차야만 진정한 행복을 얻었다고 평가하는 것일까?

지금은 그런 방향으로 나를 현혹하고 깎아가려는 말들을 경계한다. 그런 자기 부정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고 한다. 현재의 나를 미워하고 불확실한 미래의 모습만을 꿈꾸며 발버둥치지 않아도, 나는 꾸준히 최선을 다해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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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5. 13. 15:13  ·  USB    · · ·

This is a secret.
Sorry....

나는 몇 년간 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기능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문자 그대로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일은 멀쩡히 했고, 학위과정도 밟았으며 사회생활도 잘 했다. 딱히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언젠가부터 입을 열 때마다 불편함이 가득 차올랐다. 차라리 답이 있는 문제는 덜했다. 논리적으로 답을 유도해 예, 아니오의 결론을 말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어김없이 불안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목구멍을 압박했다. 원래도 남들 앞에서 말을 잘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괜히 식은땀이 나고 머리가 어지럽고 알 수 없는 불편한 느낌이 머릿속을 꽉 메웠다. 수십명의 청중이 아니라 하나 둘 소수의 모르는 사람 앞에서도, 심지어 친한 사람들 앞에서도 불편함은 가시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이 발표였다. 고작 5분의 발표에도 준비하는 데는 며칠의 시간조차 모자랐다. 모임에서도 딱히 무어라 말할 지 모르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전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을 수많은 화제들이 버거웠다. 자연스럽게 오고갔을 대화는 부담이 되었고, 이런 버거움을 들키지 않기 위해 상대가 말을 할 때는 온 힘을 다해 경청해야 했다. 최대한 올바른 반응을 돌려주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마치 당연하게 호흡하던 것을 의식적으로 흉내내려다 보면 도무지 알 수 없어지는 그런 상황과도 비슷했다. 내 말을, 내 발화를 생소하게 자각하는 것은 그렇게 눈덩이처럼 구르고 굴러 결국 말을 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지인들 또한 만나면 반갑고 즐거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체력과 정신력의 소모가 지나치게 컸다. 점점 진이 빠졌다. 가뜩이나 많지도 않은 편이었던 친구들과의 만남도 줄어들었다. 사실 이것은 알고보면 부차적인 문제이긴 했다. 말하기가 불편한 것은 그만큼 내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외부로 향하려는 충분한 열의와 능동성이, 그리고 정당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의 나는 잘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명확히 말할 수 있다. 몇 년 전부터 품고 있기가 버거웠던 심리적인 문제가 이런 현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갈무리하지 못한 과거의 사건들이 모든 것의 분명한 원인이었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다시 한 번 과거의 일들을 내 안으로 우겨넣던 때였다. 작은 주머니 속에 너무 많은 솜을 집어넣은 것처럼, 자꾸만 밖으로 튀어나오는 많은 것들을 애써 꾹꾹 눌러담으며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것들이 터질 날이 오겠구나. 지금 이렇게 괜찮은 척 외면해도 결국 언젠가는 이것들과 마주해야 할 날이 올 것이구나.

그러니까 난데없이 일어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6년쯤 전 내가 생각했던 대로 나는 진한 후폭풍을 맛보게 되었고, 단시간만에 좋지 않아진 상태로 몇 년간을 헤매게 되었다.

답답함. 이 기간의 답답함은 정말로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것이다. 답답함은 쌓이자 의문이 되었다. 그리고 지나친 의문은 독이 되어 스스로를 괴롭혔다. 풀리지 않는 답답함은 고독함이 되었고, 고독함은 발 밑의 바닥 없는 수렁을 만들었다.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감각, 내 일상의 무언가가 잘못 뒤틀려 있다는 감각이 나를 지배할 때 사람은 불행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출구 없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스스로의 사고에 붙잡혀 안으로만 가라앉게 된다. 왜? 라는 의문이 많은 사람은 힘들다. 매사 의문을 품는 것은 곧 모든 것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모든 것에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사는 매 순간, 매분 매 초, 우리를 둘러싼 모든 인과관계에 정말로 그렇게 쏙쏙 들어맞는 완벽한 의미가 있을까. 

그렇지도,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인생은 예상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데, 이해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완벽히 끼워맞추려 하는 것 자체가 고통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일련의 흐름으로 예상가능한 미래를 사는 것만큼 단조롭고 무료한 것이 있을까. 예상치 못한 고난을 불행이라고 여기는 것 만큼이나, 빤히 보이는 미래를 사는 것은 행복이 아닌 그 반대에 놓여진 것일지 모른다.

나는 무엇이든 분석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예전부터 스스로의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당시에 분명하게 자각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앞으로 풀어야 할 스스로의 문제가 있는 걸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그리고 매번 겪는 나의 반응과 현상들에 대해 나는 스스로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나는 이런 행동을 하게 되고, 여기에는 어떤 근원이 있는지. 좋은 습관이었지만, 문제는 스스로가 해결에 도달하지는 못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탐구해야 할 왜? 라는 숙제만 잔뜩 안은 채 나는 청소년기를 끝냈다. 내가 당시에 알지 못했던 이 결과의 숨은 문제는, 내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만을 깨달은 채 더 이상의 진보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인이 되어 기어이 내게 불을 붙이고야 말았다. 언젠가 있었던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 때부터 내가 문제있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거두지 못했다. 말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도 그 부작용이었다. 모든 화살표를 안으로 돌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내가 스스로를 공격한다는 사실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닫힌 부정적 사고회로 속을 맴돌게 되었다. 그렇게 아래로 아래로 빠져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얼마전에 이 사고회로의 근원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런 순간은 뭔가 예기치 않게 오는 모양이다.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물론 내가 만들고 갇혀 있었던 사고의 틀이었지만, 동시에 그건 내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알기 쉬운 것이었다. 내가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믿게 만들었던, 어린 시절에 주어진 매번의 패턴이 그것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건 일종의 조각칼처럼 나와 내 사고를 깎고 다듬었다. 그게 향하는 방향은, 아마도 그들이 원했던 어떤 모습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그들 안에서 그 어떤 형태를 보곤 한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상대를 내 생각대로 바꾸고 싶다는 것. 어떤 노력과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 그렇게 '해야만' 옳은 일이라는 믿음. 그 신념 또는 착각에 사로잡혀 범하는 우가 세상에는 얼마나 많을 것인지.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대로 타인을 교정하고 깎는 데 필요한 것은, 결국은 내가 상대보다 낫다는 우월감이다. 당신보다 많이 배웠고, 오래 살았고, 더욱 현명하고 나은 위치에 생각. 그 오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어느 상황에서도 그 점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될 것이고, 설령 정말로 어떤 격차가 있다 하더라도 그걸 가르치는 방식은 상대를 깎고 조각하는 식이어서는 안된다. 어른과 아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교정할 대상으로 보는 순간 존중은 사라져 버린다. 나는, 그러니까 존중받지 못한 채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내 생각을, 내 말을 존중받지 못한 세월이 너무 길어 편하게 내뱉어야 할 말들이 내게는 헤라클레스의 과업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졌던 것이다. 매번의 말들이 평가당할까 두려웠고 틀린 것일까 두려웠다. 상황에 부적절할까 불안했고 상대가 옳지 않게 생각할까 무서웠다.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느니, 차라리 옛날처럼 입을 다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내가 겪었던 모든 것이 옳지 못한 일이었고, 있어서는 안되었던 일이라는 것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많은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다. 그건 교육이라는 이름 하에 이루어졌던 지나친 통제와 학대였다. 이걸 제대로 알지 못했던 시간들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들을 마주 사랑해야 마땅하다는 의무감과 동시에 마땅한 만큼, 그들이 원하는 만큼 그러지 못하는 나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나는 결국엔 늘 그랬듯이, 내가 잘못되었다는 결론에 자꾸만 도달할 뿐이었다. 사실은 정말로 바르지 못한 일이었고, 내가 이렇게 느끼는 것은 전혀 죄책감을 가질 일도, 잘못된 일이 아니었는데도. 그건 참으로 비겁한 폭력이었다.

생각해 보면 단순한 것이었다. 결국엔 사랑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이 발생했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나는 지독하게 깎여나가고, 억지로 짜맞추어지고 반평생 이상을 그 후유증에 시달리며 때로 눈물 없이는 잠들 수 없는 밤을 맞이해야 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그놈의 사랑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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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2. 7. 03:01  ·  USB    · · ·

솔트레이크 시티.


웹페이지를 이것저것 만들고 코딩하고 다듬다가 편하게 살기로 마음먹었을 즈음, 나는 갑자기 솔트레이크 시티에 꽂혔다.

사실 이 도시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다. 공항편 목록에서 유타 주에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았지 딱히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무언가를 고민할 때 퍼뜩 떠오른 것이 갑자기 너무 마음에 들고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때. 내게는 솔트레이크가 바로 그것이었고, 그래서 내 도메인은 어쩌다보니, 그러나 확고한 결심 하에 saltylake가 되었다.


원래는 silent sea 정도를 고려하고 있었다. 고요한 바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원형은 침묵의 바다 혹은 '무음의 바다' 이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가 생각하는 삶의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내겐 오랫동안 그것이 바로 이 '무음의 바다' 였다.

이 이미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로놓인 백사장과 시리게 빛나는 바닷물이 있는 그런 바다. 파도도 치지 않는, 아무 소리도 없는 고요한 바다. 귀가 멀어버린 것처럼 아무런 소리가 없는 바다. 


백사장의 나무그늘 하나 없는 뙤약볕이 닿는 모든 것을 오그라붙게 만들고, 살갗이 타들어가 화상을 입을 것 같이 쨍한 태양빛이 내리쬐는. 손으로, 웅크린 무릎으로 버석한 모래가 무수히 파고들고, 너무 오래 햇빛에 말라붙은 모래에선 먼지같은 냄새가 날 것이다. 


그 속에서 달리 피할 곳도, 아무도 없이 그저 하염없이 웅크려 기다리고 있는 것. 그리고 그 망연한 모래들 속에 사금파리같이 숨어 있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간신히 찾아 꼭 쥐고 놓치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이 내게 떠오른 삶이었다.


너무도 정확한 아득함을 담고 있는 이미지는 어느 순간 떠올라 잊히지 않는 표상이 되었다. 황량한 사막과도 같이 아무도 없고, 무엇도 없는. 물론 이 느낌을 누구에게도 완벽하게 전달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가끔 단 몇 개의 단어로도 나와 꼭 같은 방식으로 삶을 설명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걸 깨닫는 순간은 본능이다. 글을 보는 순간 확 덮쳐오는 무언가의 느낌이다.



내 도메인을 보고 누군가는 눈물을 떠올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소금기어린 물을 생각하면 으레 바닷물과 눈물 아니겠나. 이 경우 내 도메인의 속뜻은 눈물의 호수가 될 것이다. 글쎄, 하지만 내 페이지들이 마냥 눈물이라는 단어로만 느껴지거나 기억되지는 않았으면 한다. 별로 즐겁지 않은 얘기도 있긴 하겠지만 한없이 지루한 내용으로 이걸 채우고 싶지도 않고, 그럴 만한 대단하게 재미없는 일들만 있었던 것도 아닌 데다가 무엇보다, 정말로 내가 이걸 선택한 데는 그리 엄청난 뜻이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솔트레이크를 생각하면 빛바랜 붉은 색의 병뚜껑을 떠올린다. 어디서 보았는지도 모르겠지만 60년대 즈음에 팔았을 법한 빈티지 맥주 라벨 같은, 크게 휘어진 S로 시작하는 Saltlake 문구가 들어있는 그런 것이다. 그리고 물안개와 뾰족하게 솟은 나무들이 있는 호수의 이미지도 함께 떠올린다. 이렇게 선명하게 상상할 수 있는 걸 보면 정말로 어디선가 본 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할수록 단어의 어감이 더욱 마음에 든다. 그래서 saltylake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향하는 즉흥적인 즐거움이 이것을 선택한 것이다. 결국은 즐거움이 전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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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2. 1. 23:00  ·  단상    · · ·

그들을 미워했다. 내게 지울 수 없는 성격적 손상과 트라우마를 남기게 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돌이킬 수 없다. 영구적 결함이다. 내가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지니게 된 특성들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정말 그랬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건 절대 0은 아니지만 동시에 100 또한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영향은 미쳤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가 도저히 힘들지만, 어쨌든 나는 그 모든 일이 없었어도 이렇게 성장했을 수도 있다. 내가 가지고 태어난 내재적 천성들 때문에.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꼭 그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내 영역을 침범할 때마다 번번히 격하게 으르릉거릴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또 그랬어! 나한테 또 그랬어. 아직도 옛날과 똑같아! 하면서 새롭게 분노할 필요가. 
난 이제 너무 지쳤다. 아무래도 미워하기에 지친 것 같다. 같은 영역을 맞대고 사는 인간들을 미워하는 것이 이렇게 피곤한 일인 줄 몰랐다. 게다가 그들은 평범한 다른 누군가라면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할, 뗄레야 떼기도 힘들고 현실적으로 아직 그럴 수도 없는, 정말 지겹고 찰거머리 같은 인간들이다. 나는 평생의 반 이상을 그들을 미워하는 동시에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고, 때로는 사랑한다고 착각을 하기도 하고 증오하기도 하며 갈팡질팡하다 종내는 그런 나를 스스로 격리시켜 문제적 인간으로 분류하는 것으로 이슈를 종결지었다. 
그러나 임시방편은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자 나는 정말로 심각해졌다. 나의 관점에서 완벽히 이해하지 못할 타인들과 어쩔 수 없이 타협하기 위해 만들었던 머릿속 인간 분류표 도서관도 이때만큼은 정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구석에서 스스로 꼬리표를 붙인 채 침묵하는 일은 정말이지 지루하고 괴로웠다. 최악이었다. 거기엔 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라는 한 인간 대신 내가 붙인 분류표만이 팔락거렸다. 

이 기록은 지친 내가 남기는 과거와 기억의 편린이다. 지쳐 쓰러지고 이제 막 일어나려 하는 인간이 쓰는 내밀한 진실이자 비밀이다. 단지 나 스스로를 지탱하고 품고 있기에는 버거웠던 많은 것들을 덜어내고자 함이다.

불에 데인 자욱처럼 때로는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겠지만 세월이 가고 나를 보살필수록 옅어지리라 믿는다. 살이 움푹 패인 자리에도 어쨌든 새 살은 차오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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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2. 1. 18:34  ·  USB    · · ·